재벌도 공범이다

김상조(한성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16-11-15   
“안녕하세요? 교수님.” 강의실을 오가며 마주치는 학생들이 살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나의 대꾸는 매우 퉁명스럽다. “안녕하지 못해. 요즘 안녕한 대한민국 국민이 어디 있어?” 트럼프 당선 이후부터는 “전 세계가 안녕하지 못해”로 나의 퉁명한 대꾸는 한걸음 더 비약했다.

나라 안팎으로 정치가 불확실성의 진앙이 되고 있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현상은 모든 경제주체들이 판단을 멈춘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이 그렇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 5년, 10년 후를 내다보는 전략적 경영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억울하다. 정권 실세가 겁박하는데 돈 내지 않고 배길 수 있겠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기업들이 나오고, “어쨌든 경제는 돌아가야 한다. 경제부총리 인사청문회라도 먼저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그럴듯하지만, 과연 그런가? 정녕 기업은 정경유착의 피해자일 뿐이고, 경제를 정치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

정경유착을 경제학적으로 정의하면, ‘규제자(정치)와 피규제자(경제) 간의 담합구조를 통해 독점적 지대를 창출하고 분배하는 부패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의는 상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경유착의 원인과 해법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낳는 경향이 있다. ‘규제자 대 피규제자’라는 말이 부지불식간에 정치와 경제 사이의 수직적 관계(갑을관계)를 함축하고 있고, 따라서 ‘정치실세=가해자’, ‘기업=피해자’라는 잘못된 등식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정경유착의 양상도 변화한다. 과거 개발독재 시절에는 정치권력이 절대적 우위에 있었고, 사업 인허가 및 재정·금융적 지원의 특혜적 배분이 독점적 지대를 만들어내는 원천이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서 상납이 이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개발독재의 산물인 경제권력은 정치권력을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재벌 스스로 독점적 지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현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의 대가로서 떡고물이 주어진다. 즉 과거에는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작위)가 정경유착의 시발점이었다면, 이제는 정부의 정당한 권한 행사마저 유보하는 소극적 태도(부작위)가 정경유착의 조건이 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정경유착을 ‘비선 실세의 삥 뜯기’로만 볼 수는 없다. 재벌의 경제력 오남용을 규제하고 후진적 지배구조를 개혁하는 것은 정부의 정당한 권한이자 막중한 책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공약한 경제민주화마저 포기함으로써 정경유착의 부패 사슬을 되살렸다. 이것이 설사 현행 형법상 뇌물죄의 구성요건에 해당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법감정으로는 분명 유죄다. 그리고 그룹 지배권을 유지·승계하기 위해 온갖 불법·부당행위를 서슴지 않는 총수일가들이야말로 비선 실세의 공갈협박을 자초한 것이니, 재벌은 정경유착의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한 7개 그룹 총수들 중 현행법의 엄정한 집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작금의 정경유착은 작위가 아닌 부작위의 산물이다.

그럼 망국의 정경유착 사슬을 끊으려면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가. 정치개혁이 근본적 과제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 100만 촛불집회의 열망, 밑으로부터 끓어 넘치는 그 에너지를 담아낼 합리적 정치제도와 현명한 정치지도자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솔직히 큰 기대를 걸지는 않는다.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평가·보상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4~5년에 한 번씩 띄엄띄엄 이루어질 뿐이며, 그나마도 평가기준과 보상체계가 매우 비합리적이다. 특히 5년 단임의 대통령과 그 측근들에 대해서는 재평가의 기회조차 없다. 그래서 정치개혁은 어렵다.

반면 기업은 시장에서 매일매일 평가를 받으며, 평가 결과가 나쁘면 존속이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에 올바른 방향의 자극을 가하는 것이 개혁의 실효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부작위를 빌미로 ‘삥’을 뜯어갈 소지가 없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지배구조 개선이고, 재벌개혁이며, 경제민주화다. 지난 주말 촛불집회에서 확인된 국민적 에너지가 재벌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극복하고 기업개혁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런 차원에서 검찰의 수사를 주목하며, 검찰이 기소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주주대표소송 등을 통해 법적 책임을 물을 계획임을 밝힌다.

* 이 글은 경향신문 11월 15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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