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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과 97년의 갈림길에서

한국경제는 1960년대 이래 30여년 동안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기록했다. 반면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성장동력 소진과 양극화 심화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이러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2008년 이후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아 생존전략을 재구성해야 하는 한국경제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이 될 터이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성공이 작금의 실패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성공의 결과물인 87년 체제가 이제는 위기의 원인이자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5년 단임 대통령 중심제로 요약되는 현행 헌법질서, 즉 87년 체제는 고도성장기의 유산이다. 1987년 당시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릴 만큼 빠르게 성장했고 재벌은 돈을 벌었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의 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것이 낙수효과를 현실화하고, ‘정부·재벌’과 ‘노동·시민사회’ 간의 암묵적 담합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되었다. 요컨대 87년 체제는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간의 불안정한 타협의 산물이다. 87년 헌법에 119조 1항(자유시장질서 조항)과 2항(경제민주화 조항)이 병렬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재벌 중심의 경제질서는 인정하되, 일정한 규제를 통해 성장의 과실이 확산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 본격 도입된 글로벌화와 ICT(정보통신기술)화의 물결 속에서 87년 체제의 경제적 토대에 균열이 발생했다. 2000년대의 ‘중국 효과’는 그 붕괴를 지연시키는 일시적 환경이었을 뿐이다. 드디어 2008년 위기 이후 저성장·불확실성의 뉴 노멀 환경에서 87년 체제는 작동 불가능하게 되었다. 최근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에 불이 붙었으나, 경제적으로 87년 체제는 이미 붕괴했다. 수출은 침체를 넘어 절대규모가 줄고 있고, 중국은 우리의 시장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되었고, 성장의 엔진이던 조선·해운·철강·석유화학 등은 모두 구조불황 산업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경제는 성장을 멈추었고, 상당수 재벌은 부실에 빠졌다. 금융부문의 건전성이 깨지면서 급격하게 무너지는 형태의 위기보다는, 실물부문의 경쟁력이 마모되어 ‘온탕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87년 체제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며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어떤 세력도 자신의 의도를 관철할 헤게모니는 갖지 못하면서, 다른 세력의 의도는 언제든지 좌절시킬 수 있는 비토 파워만 넘치는 사회가 되었다. 이는 보수 또는 진보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87년 체제의 지속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기득권 세력이 보수와 진보 진영에 모두 있기 때문이다. 양쪽 똑같이.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전략을 수정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새로운 세력이 보수와 진보 진영에 모두 없기 때문이다. 이 역시 양쪽 똑같이.

수백만개의 촛불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킨 광장의 시민들은 1987년 여름의 열기를 떠올릴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불경스럽게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1997년 초겨울의 추위가 동시에 떠오른다. 1996년 12월26일 새벽에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을 날치기 처리했다. 이후 두 달여 동안 종묘공원에서 총파업·총궐기 대회가 진행되었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날치기는 잘못된 것”이라며 항복 선언을 했다. 대중이 승리했다. 그러나 그 직후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재벌들의 연쇄부도가 이어지면서 외환위기로 치달았다. 우리 모두가 패배했다.

지금 광장의 요구는 1987년 이상으로 고양되어 있다. 반면 국내외 경제 환경은 1997년이 무색할 정도로 최악이다. 이 양자의 괴리 속에서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현재 우리는 1987년 승리와 1997년 위기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요즘 분위기에서 이런 말 했다가는 ‘부역자’ 소리 듣기 십상이지만, 나는 매우 비관적이다. 조기 대선이 불가피해지면서 잠룡들은 더없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변변한 정책공약집도 만들지 못하고 인수위도 없이 출범하는 ‘준비 안된 대통령’을 보게 될 게 뻔하다. 그럼 대책은? 상상력 결핍증의 천박한 경제학자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국민을 통합하고 그 인내심을 제고하는 정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하나마나한 말만 되뇔 뿐이다.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관적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 12월 27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